나는 ‘재일 교포의 메카’로 불리 우는 도시,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빠 셋의 귀여운 막내 여동생으로 자랐습니다. 아버지는 15살에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오셨고 해방을 맞은 후 정세에 따라 북한을 ‘조국’으로 선택하셨습니다. 그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해 열렬히 프로포즈하여 결혼에 성공하셨다고 하는데, 평소 엄격한 성격의 아버지도 이 얘기가 나올 때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시곤 합니다. 부모님은 결혼 후 함께 열정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셨고, 오빠들이 청소년이 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‘조국’인 북한으로 보낼 결심을 하셨습니다. 오빠들이 떠나던 날. 6살이었던 나는 ‘귀국’의 의미도 모른 채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. 어머니는 오빠들을 태운 배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셨습니다. 나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죽을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. 이후 평양의 실정을 들은 어머니는 오빠들에게 물자를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. 어린 조카가 난방이 안된 학교에서 동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“이런 짓은 어미 밖에 못해준다”고 웃으시면서 겨울마다 큰 상자에 일회용 손난로를 가득 담아 보내주고 계십니다. 오빠들과 달리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나는 자연히 아버지와 갈등이 깊었고, 심지어 대화조차 안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.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인생을 카메라에 담아 볼 것을 결심했고 10년간 렌즈를 통해 아버지를 지켜보았습니다. 그리고 나의 마음은 점차 변해 갔습니다. 머리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오며, 미움은 그리움으로, 갈등은 사랑으로 변해갔습니다. 어느 날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이 후회 되냐고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진솔한 답변을 해 주셨고 난 앞으로 아버지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. 하지만 곧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, 나는 아버지와 좀더 일찍 대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.